장면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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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내각(張勉內閣, 1960~1961)은 4·19 혁명 뒤 내각 책임제로 고친 헌법에 따라 1960년 8월 민주당의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어 이끈 제2공화국 정부로, 이듬해 5·16 군사 정변으로 9개월 만에 무너졌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외무부 장관 허정이 과도 정부를 이끌었다. 국회는 독재의 원인이 대통령에게 권력이 몰린 데 있다고 보고 1960년 6월 15일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헌법을 고쳤다(제3차 개헌). 7월 29일 민의원·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크게 이겼고, 8월 12일 국회에서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8월 19일 장면이 국무총리로 뽑혔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의례적인 지위에 머물고, 실제 행정권은 국무총리가 이끄는 국무원이 가졌다.[1]
장면(1899~1966)은 정부 수립 때 유엔 총회에 수석 대표로 나가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냈고, 초대 주미 대사와 국무총리를 지냈다. 1956년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고, 1960년 3·15 부정 선거에서는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가 이기붕에게 밀려 낙선했다.[2]
- 제3차 개헌(1960년 6월) - 내각 책임제와 민의원·참의원의 양원제 국회를 두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사전 허가와 검열을 금지하고, 선거 연령을 20세로 낮추었으며, 헌법 재판소와 중앙 선거 관리 위원회를 헌법 기관으로 두고, 지방 자치 단체장을 원칙적으로 주민이 직접 뽑게 했다.
- 제4차 개헌(1960년 11월) - 3·15 부정 선거 관련자와 반민주 행위자, 부정 축재자를 거슬러 올라가 처벌할 수 있도록 특별 재판부와 특별 검찰부를 두는 근거를 헌법에 넣었다(소급 입법 개헌).
- 민주당의 분열 - 집권 민주당 안에서 장면의 신파와 윤보선의 구파가 대립하다가 구파가 신민당을 만들어 떨어져 나갔다. 내각은 여러 차례 개각을 거듭했다.
- 시위의 분출 - 억눌렸던 요구가 터져 나와 학생·노동자·교원 노조의 시위가 이어졌다. 정부는 반공 임시 특례법과 데모 규제법을 만들려 했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 경제 제일주의 - 국토 건설 사업으로 경지 정리, 관개·배수, 산림녹화, 댐 건설을 추진했다. 1961년 4월 무렵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안을 마련했으나 정변으로 실행하지 못했고, 이 안은 뒤에 군사 정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바탕이 되었다.[3]
- 군과 경찰 - 군의 정치적 중립과 연차적 감군, 경찰 중립화 법안을 내세웠다.
- 통일 정책 - 학생과 혁신 세력 사이에서 중립화 통일론과 남북 협상론이 번지자, 정부는 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 방안을 내세웠다.
- ↑ 기록으로 보는 4.19혁명, 국가기록원, 2026-10-19 확인.
- ↑ 2.0 2.1 장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 ↑ 민주당 정부 장면 국무총리의 국회 시정연설, 우리역사넷(사료로 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