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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궤(朝鮮王朝儀軌)는 조선 왕실과 나라의 큰 행사가 끝난 뒤 그 준비와 진행 과정을 뒷날 본보기로 삼도록 글과 그림으로 자세히 기록한 책들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올랐다.

『화성성역의궤』의 한 면

'의궤'는 의식(儀式)의 본보기(軌範)라는 뜻이다. 왕실의 혼인(가례), 세자 책봉, 장례와 제사, 잔치(진연), 궁궐 건축, 왕의 행차, 실록 편찬 같은 일을 맡은 임시 관청(도감)이 행사가 끝나면 주고받은 공문서, 참여한 사람과 물자, 비용, 의식의 순서를 모아 의궤를 엮었다. 조선 전기의 의궤는 임진왜란 때 모두 없어졌고, 지금 남은 가장 오래된 것은 1601년(선조 34)의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이다. 영조 때 가장 많이 만들어졌고, 대한 제국 시기(1897~1910)에도 68종이 엮였다.[1]

  • 그림 기록 - 행사 장면과 행렬을 그린 반차도, 쓰인 기물과 건물의 그림을 실어 글만으로 알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 준다.
  • 어람용과 분상용 - 왕이 보는 어람용 한 부는 좋은 종이와 비단 표지로 정성 들여 만들고, 나머지는 관련 관청과 사고에 나누어 두었다.
  • 분량 - 국가유산포털은 모두 3,895여 권으로 소개하며,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546종 2,940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287종 490책이 있다.[2]
  • 세계 기록 유산 - 2007년 6월 남아프리카 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기록 유산 국제 자문 위원회에서 등재가 결정되었다.[2]
  • 『화성성역의궤』 - 정조 때 수원 화성을 쌓은 과정과 쓰인 기계(거중기 등), 인력과 비용을 기록했다.
  • 『원행을묘정리의궤』 -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다녀온 행차와 회갑 잔치를 기록했다.

외규장각 의궤의 약탈과 귀환

편집 원본 편집

1782년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어 어람용 의궤를 많이 보관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불을 지르고 의궤 등 도서를 약탈해 갔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있던 이 의궤는 박병선이 찾아내 알렸고, 2011년 5년마다 갱신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소유권은 여전히 프랑스에 있다.[3]

조선의 기록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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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록
행사의 과정을 글과 그림(반차도)으로 정리, 병인양요 때 일부 약탈 의궤
사초와 시정기를 종합해 왕이 죽은 뒤 편찬 조선왕조실록
정조의 『존현각일기』에서 비롯된 국정 일기 일성록
허준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의서를 모아 정리 동의보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 활자로 간행 직지심체요절
  1. ↑ 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조선왕조 의궤,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2026-10-21 확인.
  3. ↑ 외규장각의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