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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침입(紅巾賊의 侵入)은 원 말기 중국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1359년과 1361년 두 차례 고려에 쳐들어온 일로, 두 번째 침입 때 개경이 함락되어 공민왕이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란했다.

홍건적은 원 말기에 허베이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러 이렇게 불렸다. 홍두적·홍적이라고도 한다. 그 한 갈래가 요동을 차지했다가 원의 반격에 밀리자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들어왔다. 이 무렵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등 반원 개혁을 펼치고 있었는데, 홍건적의 침입으로 나라 살림이 크게 흔들리고 개혁도 움츠러들었다.[1]

1차 침입(1359~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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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9년(공민왕 8) 12월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와 의주·정주·인주를 무너뜨리고 철주와 서경까지 차지했다. 고려는 이승경을 도원수로 삼아 이듬해 1월 서경을 되찾고, 2월에는 함종·안주 등지에서 적을 무찔러 압록강 너머로 몰아냈다. 이 뒤에도 홍건적은 배를 타고 황해도 해안을 노략질했다.

2차 침입(1361~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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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경 함락 - 1361년 반성·사유·관선생 등이 10만 명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와 삭주·안주를 함락하고 절령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선봉이 흥의역에 이르자 공민왕은 11월 왕실과 함께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고, 개경은 적에게 넘어갔다.[2] 홍건적은 개경에 들어와 궁궐을 불태우는 등 크게 해를 끼쳤다. 2차 침입이 시작된 때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홍건적' 항목은 10월로, '복주 천도' 항목은 9월로 적어 서로 다르다.
  • 복주 피란 - 공민왕은 광주를 거쳐 12월 복주(안동)에 이르렀고, 이곳을 임시 도읍으로 삼아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고 반격을 명했다.[3]
  • 개경 수복 - 1362년 1월 안우·이방실·김득배·최영·이성계 등이 이끄는 20만 군사가 개경을 에워싸고 쳐서 사유·관선생을 죽이고 적을 압록강 너머로 몰아냈다. 공민왕은 50여 일 만에 개경으로 돌아왔다.[1]
  • 개경을 되찾은 직후 김용의 계략으로 안우·이방실·김득배가 총병관 정세운을 죽였다가 처형되는 등 정국이 어지러워졌다.
  • 홍건적을 막으려고 원과 다시 손을 잡으면서 반원 정책이 흐려졌다.
  • 전쟁에서 공을 세운 최영·이성계 같은 무장의 세력이 커졌다. 이후 왜구를 물리치며 성장한 이들이 고려 말 정국을 이끌었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졌다.
  • 경기 지방의 호적이 없어지는 등 국가의 통제력이 약해져 권세가의 토지·인구 탈점이 늘었다.
  • 피란과 약탈의 참상은 뒤에 김시습의 『금오신화』 가운데 「이생규장전」의 배경이 되었다.

고려 후기 외적의 침입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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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 때 대응
몽골 1231~1259 강화 천도, 처인성 전투, 팔만대장경 조판 (→ 고려 몽골 전쟁)
홍건적 1359, 1361 2차 때 공민왕 복주 피란, 1362년 개경 수복
왜구 14세기 중엽~ 홍산·진포·황산 대첩, 박위의 쓰시마 정벌(1389) (→ 왜구)
거란 993~1019 서희의 외교 담판, 귀주 대첩 (→ 고려 거란 전쟁)
  1. ↑ 1.0 1.1 홍건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고려사』 권39 세가39 공민왕 10년 11월, 왕 일가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고 홍언박 등이 호종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고려사』 권39 세가39 공민왕 10년 12월, 복주에 도착한 왕이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