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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방직(京城紡織, 1919~)은 1919년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국인 자산가들이 세운 면방직 회사로, 일제 강점기 한국인이 경영한 대표적 민족계 대기업이다. 정식 이름은 경성 방직 주식회사이다.

서울 영등포의 옛 경성 방직 사무동

경성 방직은 조선 경제의 부흥과 자립을 내세우고, 생활필수품인 면직물을 국내에서 생산하려고 1919년 설립되었다. 1920년 자본금 100만 원으로 영등포에 공장 터를 사들여 1923년 공장을 완공했다. 직기는 일본 도요타 자동 직기 제작소에서 들여왔고, 원료인 면사도 일본 오사카의 상점에서 공급받았다. 1923년 4월 첫 광목 제품을 내놓았다.[1]

민족 정서를 내세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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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산 장려 운동 - 1920년대 초 물산 장려 운동이 일어나 무명옷이 유행하자, 경성 방직은 잡지 『동명』에 "처음으로 조선 사람의 자본과 기술로 된 광목"이라며 삼성표·삼각산표 광목을 광고했다.[2]
  • 태극성 광목 - 1930년대에는 '태극성' 상표의 광목을 "우리의 옷감, 조선의 자랑"이라는 문구로 『동아일보』에 광고해 국산품 애용 정서에 호소했다.[3]

초창기에는 기술과 경영 경험이 부족해 일본 대기업 제품과의 경쟁에서 고전했다. 『신편 한국사』는 1923년 무렵부터 총독부가 경성 방직에 거액의 보조금을 주기 시작했고, 이로써 회사가 정치적으로 일제와 가까워졌다고 본다.[2] 1930년대에 영등포 공장을 넓혀 직기 672대를 갖추었고, 1935년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사장이 되어 방적 시설을 들였다. 1939년에는 만주에 남만 방적을 세우기로 하는 등 전시 체제기에도 몸집을 키웠다. 백과사전은 경성 방직을 민족 정서를 경영 자원으로 성장한 민족 기업으로 보면서도, 식민지 권력과의 유착과 전시 협력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고 적는다.[1] 광복 뒤에도 '경방'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사회·문화 모습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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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 시기
경성 방직 설립, 광목 광고 1919년 설립, 1920~1930년대 광고
형평 운동(조선 형평사 창립) 1923
잡지 『신여성』 발행 1923~1934
영화 「아리랑」 단성사 개봉(나운규) 1926
소설 「상록수」 연재(심훈), 브나로드 운동 1931~1935
몸뻬 강요(민족 말살 통치) 1940년대
새마을 운동 1970(대한민국)
  1. ↑ 1.0 1.1 경성방직주식회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나.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신편 한국사』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21 확인.
  3. ↑ 국산품 애용과 광고 규제, 한국 문화사(광고),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