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 농민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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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농민 봉기(古阜農民蜂起, 1894)는 1894년 음력 1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전봉준을 지도자로 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를 점령한 봉기로, 동학 농민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고부 민란이라고도 한다.
- 사발통문 - 전봉준과 동지 20여 명은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사발을 엎어 놓고 그 둘레에 이름을 돌려 적은 통문을 만들어 각 마을 집강에게 돌렸다. 고부성을 쳐서 조병갑을 효수하고, 무기고를 차지하며,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장 올라간다는 계획을 담았다.[1]
- 관아 점령 - 1월 장터에 모인 농민 1천여 명이 전봉준을 앞세워 두 길로 나뉘어 고부 관아로 들어가 힘들이지 않고 점령했다. 조병갑은 뒷문으로 달아나 전주 감영으로 피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민란이 터진 날을 1월 10일로, 『신편 한국사』는 말목장터에 모인 날을 1월 11일 아침으로 적는다.[2]
- 수탈의 시정 - 농민들은 아전을 붙잡아 죄를 따지고, 무기고를 열어 무기를 나눠 가졌으며, 물세로 거둔 곡식 1,400여 석을 되찾아 나누고 새로 쌓은 보를 허물었다. 1월 17일에는 노약자를 돌려보내고 장정만으로 말목장터에 진을 쳤다.
- 전봉준의 뜻 - 전봉준은 뒤에 재판에서 자신이 입은 피해가 크지 않은데도 나선 까닭을 "한 번 세상을 건지려는 목적"이었다고 진술했다(『전봉준 공초』).[2]
정부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을 새 군수로,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냈다. 박원명이 잔치를 베풀어 죄를 묻지 않겠다고 달래자 농민들은 3월 초 흩어졌다. 그러나 이용태는 3월 2일 역졸 800여 명을 이끌고 들어와 봉기 참여자를 모두 동학교도로 몰아 잡아들이고 집을 불태웠다. 이 탄압에 분노한 전봉준·손화중·김개남 등이 3월 무장에서 다시 일어나 백산에 모이면서, 한 고을의 민란이 전라도 전체의 농민 전쟁으로 커졌다.[3]
- ↑ 1.0 1.1 동학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 ↑ 2.0 2.1 (3) 고부민란의 전개, 『신편 한국사』 39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 ↑ (4) 관권의 대응, 『신편 한국사』 39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21 확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