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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개혁(光武改革, 1897~1904)은 대한 제국이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걸고 황제권을 강화하면서 양전·지계 사업과 상공업 진흥을 추진한 개혁이다.

을미사변 뒤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갔던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와, 8월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10월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려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고쳤다. 광무개혁은 이 무렵부터 러일 전쟁과 일본의 고문 정치로 개혁 기구가 없어지는 1904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갑오개혁·을미개혁의 급진적인 면을 보완한다는 뜻에서 점진적 개혁을 표방했고, 의정부가 아니라 황제 직속의 궁내부와 그 아래 내장원이 개혁 사업과 재원을 쥐고 이끌었다.[1]

  • 대한국 국제 - 1899년 8월 법규교정소가 만들어 반포한 9개 조의 국가 기본법. 대한국은 자주독립한 제국이며 정치는 만세불변의 전제 정치라고 밝히고, 군 통수권·입법·행정·관리 임면·조약 체결권을 모두 황제에게 몰아주었다. 국민의 권리나 의회에 관한 조항은 없었다.[2]
  • 원수부 - 1899년 황궁 안에 둔 황제 직속 최고 군 통수 기관. 황제가 대원수로서 육해군을 통령하며 군부 위에서 군령권을 직접 쥐어 군주권이 강해졌다. 1904년 말 일본의 압력으로 폐지되었다.
  • 군대 증강 - 서울의 친위대·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를 늘리고, 1898년 무관 학교를 세워 장교를 길렀다.
  • 양전 사업 - 1898년 양지아문을 두고 이듬해부터 전국 토지를 측량해 약 3분의 2에 이르는 군의 양전을 마쳤다.
  • 지계 발급 - 1901년 지계아문을 세워 토지 소유자에게 근대적 토지 소유 문서인 지계(地契)를 발급했다. 1902년 양지아문을 합쳤고,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1904년 탁지부 양지국으로 축소되며 사업이 중단되었다.[3]
  • 상공업 진흥 - 1898년 한성 전기 회사를 세워 이듬해 서대문~청량리 사이 전차를 개통하고 전등·전화를 보급했다. 1899년 대한 천일 은행이 설립되는 등 회사와 은행 설립이 잇따랐다. 궁내부 서북 철도국을 두어 경의선 부설도 시도했다.
  • 간도 - 1902년 이범윤을 간도 시찰사로, 이듬해 간도 관리사로 보내 간도의 한인을 보호하고 관할하려 했다.
  • 울릉도·독도 - 1900년 칙령 제41호로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고 석도(독도)를 관할하게 했다.

황제권 강화에 치우쳐 민권 확대를 요구한 독립 협회를 1898년 해산시켰다. 궁내부 재정 운영이 불투명했고, 특권 상인의 독점과 잡세 때문에 민간의 불만이 컸다. 러일 전쟁 뒤 한일 의정서와 고문 정치로 일본이 내정에 간섭하면서 개혁 기구는 축소·폐지되었다.

개항기 개화 정책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사실 시기
박문국을 두고 『한성순보』를 찍어 냄 1883년 (박문국)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함 1883년 (보빙사)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이 일어남 1884년 (갑신정변)
육영 공원에서 미국인 교사가 영어로 가르침 1886년 (육영 공원)
원수부 설치, 대한국 국제 반포 1899년 (광무개혁)
지계아문에서 지계 발급 1901년 (광무개혁)
  1. ↑ 광무개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대한국국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3. ↑ 지계아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