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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 학교(大成學校, 1908~1912)는 1908년 안창호가 신민회의 교육 구국 운동으로 평양에 세운 중등 교육 기관으로, 애국심과 실력을 갖춘 인재를 길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12년 문을 닫았다.

미국에서 돌아와 신민회를 이끈 안창호는 국권을 되찾으려면 먼저 사람을 길러야 한다고 보고, 평양의 김진후, 선천의 오치은, 철산의 오희원 등의 재정 지원을 받아 1908년 대성 학교를 열었다. 처음에는 각 도에 한 학교씩 세워 그 졸업생이 지방의 초등 교육을 이끌게 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개교 때 입학생은 90여 명이었고, 지원자가 500~600명에 이른 때도 있었다.[1]

  • 교직원 - 교장은 윤치호, 실제 운영을 맡은 대변 교장은 안창호였다. 장응진이 교무를 맡았고 문일평·황의돈 등이 가르쳤다. 윤치호는 105인 사건으로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나 뒤에 친일의 길을 걸었다.[2]
  • 교육 방침 - 건전한 인격, 투철한 애국정신, 실력, 건강한 체력을 기르는 것을 내세웠다. 안창호는 '주인 정신'과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강조했다.
  • 군사 훈련 - 나라를 구하려면 힘이 필요하다며 군인 출신 정인목을 체육 교사로 초빙해 군대식 훈련을 했다.
  • 교사 재교육 - 1910년부터 여름 사범 강습소를 열어 교사들을 다시 가르쳤다.

1909년 대성 학교를 중심으로 평양의 사립 학교들이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자 폐교 위기를 맞았다. 같은 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뒤 안창호는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몇 달 동안 갇혔고, 1910년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했다. 신민회가 105인 사건으로 무너지던 1912년 봄, 대성 학교는 첫 졸업생 19명을 내보낸 뒤 일제에 의해 문을 닫았다. 정주의 오산 학교(이승훈)와 함께 평안도 민족 교육의 중심이었다.

근대 학교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학교 연도 세운 주체와 특징
원산 학사 1883 덕원부 관민이 세운 최초의 근대 사립 학교
육영 공원 1886 정부,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 좌원·우원
한성 사범 학교 1895 교육 입국 조서에 따라 세운 교원 양성 학교
오산 학교 1907 이승훈, 정주
대성 학교 1908 안창호, 평양, 신민회의 교육 운동
  1. ↑ 대성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인문학관, 월간 독립기념관 2021년 9월호, 독립기념관,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