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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 617~686)는 『대승기신론소』·『금강삼매경론』 등 많은 저술로 불교 이론을 체계화하고, 무애가를 부르며 마을을 돌아 누구나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쳐 불교를 대중화한 신라의 승려이다.

원효 영정

압량군(지금의 경산) 불지촌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이름은 서당이다. 『삼국유사』는 진평왕 39년(617)에 태어났다고 적었다.[1] 650년 의상과 함께 당의 현장에게 새 유식학을 배우려 했으나 요동에서 막혀 돌아왔다. 다시 바닷길로 가던 중 직산 근처에서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그만두었다. 무덤 속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이때의 일로 전한다. 686년 혈사에서 70세로 세상을 떠났다.[2]

  • 저술 - 70여 부 150여 권을 지었다고 하며, 지금은 13부 16권 남짓이 전한다.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대승 불교 이론을 거의 다 다루었다.
  • 『대승기신론소』 - 중국과 일본에서 '해동소'라 불릴 만큼 널리 읽혔다. 『대승기신론』을 중관과 유식의 대립을 넘어서는 이론으로 보았다.
  • 『금강삼매경론』 - 『금강삼매경』을 처음으로 풀이한 책으로, 황룡사에서 강의할 때의 원고이다.
  • 『십문화쟁론』 - 여러 종파의 서로 다른 주장을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아우르는 화쟁 사상을 폈다. 그 바탕은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이다.
  • 『화엄경소』 - 분황사에서 쓰다가 「십회향품」에서 붓을 놓았다고 전한다.
  • 요석 공주와 설총 - 태종 무열왕 때 요석궁의 과부 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다. 계율을 어긴 뒤 승복을 벗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 무애가 - 광대가 놀리는 큰 박을 본떠 '무애'라는 도구를 만들고 노래를 지어 천 개 마을, 만 개 부락을 돌며 노래하고 춤추었다. 가난하고 글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를 외게 되었다.[1]
  • 정토 신앙 - 아미타불을 믿고 염불하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귀족 중심이던 불교를 백성에게 넓혔다. 고려 숙종 때 '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신라·고려의 승려와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활동 승려
『대승기신론소』·『금강삼매경론』, 화쟁 사상, 무애가로 불교 대중화 원효
『화엄일승법계도』, 부석사 창건, 관음 신앙 의상
세속 5계, 걸사표 원광
『왕오천축국전』 혜초
「보현십원가」 고려 균여
교관겸수, 해동 천태종 고려 의천
정혜쌍수·돈오점수, 수선사 결사 고려 지눌 (→ 고려의 불교)
  1. ↑ 1.0 1.1 『삼국유사』 권4 의해 「원효불기」, 원효의 특이한 사적,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원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