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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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義湘, 625~702)은 당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와 부석사를 세우고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신라 화엄종을 연 승려로, '해동 화엄의 초조'로 받들어진다.

김씨 한신(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복사에서 출가했는데, 출가한 나이를 『삼국유사』는 29세로, 백과사전은 20세 전(15세 무렵)으로 본다. 650년 원효와 함께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요동에서 고구려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붙잡혀 돌아왔다. 다시 바닷길로 당에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에게 화엄학을 배웠다. 두 번째 출발을 백과사전은 661년으로 보는데, 『삼국유사』는 '영휘(650~655) 초'에 당 사신의 배를 얻어 탔다고 적어 시기가 엇갈린다. 지엄 밑에서 뒷날 중국 화엄종을 집대성한 법장과 함께 공부했다.[1][2]
- 귀국(670) - 당에 붙잡혀 있던 김흠순(김인문이라고도 함) 등에게서 당 고종이 신라를 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 조정에 알렸다.
- 『화엄일승법계도』(668) - 화엄 사상의 요지를 210자의 시로 엮고 이를 도장 모양의 그림으로 배열한 글이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곧 하나'(일즉다 다즉일)라는 원융 사상을 담았다. 스승 지엄이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에 지었다.
- 부석사 창건(676) - 왕명을 받아 태백산(영주)에 부석사를 세워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3] 이후 해인사·화엄사·범어사 등 이른바 화엄 10찰로 가르침이 퍼졌다고 전한다. 다만 10찰이 모두 의상 때 세워진 것은 아니다.
- 관음 신앙 - 동해 바닷가 관세음보살이 머문다는 곳에 낙산사를 세웠고, 관음보살께 귀의하는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었다고 전한다. 부석사에는 아미타불(무량수불)을 모셔 아미타 신앙도 함께 폈다.
- 제자와 민중 - 오진·지통·표훈·진정 등 10대 제자를 길렀다. 문무왕이 경주에 성을 새로 쌓으려 하자 백성의 고통을 들어 말렸고, 왕이 내린 땅과 노비는 "부처님 법은 귀천이 없다"며 사양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