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하와이 한인 이민(1902~1905)은 대한 제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한국인 노동자들이 미국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건너간 일로, 한국인이 서양 세계로 공식 이주한 첫 사례이자 미주 한인 사회와 미주 독립운동의 출발점이다.

하와이의 한인 이민 가족

19세기 하와이에서는 백인 농장주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크게 늘리면서 중국인, 이어 일본인 노동자를 들여왔다. 1898년 하와이가 미국 영토가 된 뒤 농장주들은 수가 크게 늘어 파업을 벌이던 일본인 노동자를 견제할 새 노동력을 찾았다. 주한 미국 공사 알렌이 농장주 협회와 대한 제국 정부를 이어 주었고, 고종은 가뭄과 기근으로 어려운 백성의 사정과 미국과의 우호를 고려해 이민을 허가했다.[1]

  • 수민원 - 1902년 11월 궁내부에 이민 업무를 맡는 수민원을 두고 민영환을 총재로 삼았다. 미국인 데쉴러가 인천에 동서 개발 회사를 세워 이민자를 모았다.
  • 첫 이민선 -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인천)를 떠난 이민단이 일본에서 갤릭호로 갈아타고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닿았다. 『신편 한국사』는 출발 인원을 121명으로, 국가기록원 자료는 첫 이민선에 실린 인원을 101명으로 적는다. 출발 뒤 신체검사 등으로 일부가 탈락했기 때문에 숫자가 엇갈린다.[2]
  • 규모 - 1903년 1,133명, 1904년 3,434명, 1905년 2,659명으로 모두 7,226명이 건너갔다. 대부분 20대 젊은 남자였다.
  • 농장 생활 - 모집 광고는 하루 10시간 노동에 월 15달러와 무상 숙소·의료를 내걸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독의 감시 아래 사탕수수를 베고 나르는 고된 일을 했고, 인종 차별도 겪었다.
  • 이민 금지 - 1905년 4월 대한 제국 정부가 이민을 금지했다. 하와이에서 한인이 일본인 노동자와 경쟁하는 것을 꺼린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다. 같은 해 1,033명이 멕시코로 떠난 이민(멕시코 한인 이민)은 노예 같은 노동 조건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

편집 원본 편집
  • 사진 신부 - 1910년부터 사진만 보고 결혼하는 '사진 신부'가 건너가 가정을 이루었다. 1924년 미국 이민법으로 한인 이민이 막히기까지 하와이로 약 1,000명이 왔다.
  • 단체 - 한인들은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자치 조직을 만들었으며, 이는 대한인 국민회로 이어졌다.
  • 무장 독립 운동 - 1914년 박용만이 오아후섬에 대조선 국민군단을 세워 독립군 사관을 길렀다.
  • 『포와유람기』 - 1903년 하와이로 건너가 농장 감독의 통역 등을 맡았던 현순이 1909년 펴낸 하와이 견문록이다. 하와이의 지리·역사와 이민 과정, 한인들의 생활을 국한문 혼용으로 적었다. '포와(布哇)'는 하와이의 한자 표기이다.[3]

해외 이주 지역과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지역 이주 계기 대표적인 민족 운동
하와이 1903년 사탕수수 농장 노동 이민 대조선 국민군단(박용만)
미국 본토 하와이에서 옮겨 감, 유학 대한인 국민회, 흥사단(안창호)
서간도(남만주) 국권 상실 전후 망명·이주 경학사, 신흥 강습소
연해주 19세기 후반 농민 이주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
상하이 망명 동제사·박달 학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본 도쿄 유학 2.8 독립 선언
  1. ↑ 가. 이민 경위, 『신편 한국사』 44,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2026-10-19 확인.
  2. ↑ 미국의 재미한인: 구한말~일제강점기, 재외한인의 역사, 국가기록원, 2026-10-19 확인.
  3. ↑ 포와유람기(布哇遊覽記), 한국이민사박물관 주요 유물 소개, 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