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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산 선문(九山禪門)은 신라 하대부터 고려 초까지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으며 전국 아홉 곳의 산에 자리 잡은 선종의 아홉 문파로, 도의의 가지산문, 홍척의 실상산문 등을 이른다.

도의가 머문 양양 진전사 터의 삼층 석탑

선종은 경전의 글귀보다 참선으로 자기 안의 불성을 깨닫는 것을 중시해 불립문자(문자를 세우지 않음)와 견성오도(본성을 보아 도를 깨침)를 내세웠다. 신라 중대까지는 경전 공부를 중시하는 교종이 주류였고, 선종은 신라 하대에 지방 호족이 일어나면서 크게 퍼졌다. 개인의 깨달음을 앞세우는 선종의 사상이 중앙 정부의 간섭을 벗어나 독자 세력을 키우려던 호족의 생각과 잘 맞았기 때문이다.[1]

도의와 진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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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는 784년(선덕왕 5) 당에 건너가 마조 도일의 제자 서당 지장에게 남종선을 배우고 821년(헌덕왕 13) 돌아왔다. 그러나 경전 공부에 익숙한 당시 사람들이 선종을 허황하다고 여기자, 설악산의 진전사(지금의 강원 양양)에 들어가 숨어 지냈다. 그의 법은 염거를 거쳐 체징에게 전해졌고, 체징이 859년(헌안왕 3) 왕의 요청으로 장흥 보림사에 머물면서 가지산문이 이루어졌다.[2] 진전사 터에는 통일 신라의 삼층 석탑이 남아 있다.

  • 실상산문 - 홍척, 남원 실상사
  • 가지산문 - 도의(체징), 장흥 보림사(858년 명문이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 사굴산문 - 범일, 강릉 굴산사
  • 동리산문 - 혜철, 곡성 태안사
  • 성주산문 - 무염, 보령 성주사
  • 사자산문 - 철감, 영월 흥녕사
  • 희양산문 - 도헌, 문경 봉암사
  • 봉림산문 - 현욱, 창원 봉림사
  • 수미산문 - 이엄, 해주 광조사 (고려 초)

'9산'과 개창 조사의 목록은 고려 후기에 정리된 것이어서, 실제로는 이보다 많은 산문이 있었고 신라 때는 아직 종파로 갈라지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3] 가지산문처럼 왕실과 중앙 귀족 김언경 등의 후원을 받아 자리 잡은 산문도 있었다.[2]

  • 호족과 결합 - 선종 승려들은 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았고, 호족은 선종을 통해 자기 지역의 권위를 세웠다. 이는 경주 중심의 질서를 흔들어 고려 건국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신라 하대).
  • 승탑과 탑비 - 스승의 사리를 모신 승탑(부도)과 행적을 새긴 탑비가 많이 세워졌다.
  • 고려로 이어짐 - 고려 때 선종은 조계종으로 불렸고, 의천이 천태종으로 교종과 선종을 아우르려 했으며, 지눌이 수선사 결사로 선종 중심의 통합을 꾀했다(→ 고려의 불교).

시대별 불교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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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 시대·인물
진전사·보림사 등에서 참선하는 선종 승려, 9산 선문 신라 하대
화엄 사상을 펴고 부석사를 세움 신라 중대 의상 (→ 문무왕)
해동 천태종을 열어 교선 통합 고려 의천
수선사 결사, 정혜쌍수·돈오점수 고려 지눌
  1. ↑ 선종의 대두, 『신편 한국사』 11,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2. ↑ 2.0 2.1 가지산문, 『신편 한국사』 11,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
  3. ↑ 오교구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