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 공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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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 공동회(萬民共同會, 1898)는 1898년 독립 협회가 서울 종로 등지에서 연 민중 대회로, 러시아의 이권 침탈에 맞서 자주독립을 지키고 의회 설립과 개혁을 요구했으나 그해 12월 정부의 무력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아관파천 뒤 러시아는 대한 제국의 군사·재정에 깊이 간섭했다. 1897년 부임한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는 부산 절영도의 석탄고 기지 조차를 요구했고,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보냈으며, 1898년 3월 한러 은행을 열었다. 독립 협회는 1898년 2월부터 계몽 운동을 넘어 나라를 지키는 정치 운동으로 나섰다.[1]
- 첫 만민 공동회 - 1898년 3월 10일 오후 종로에서 열렸다. 서울 시민 1만여 명이 스스로 모여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뽑고, 러시아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수를 결의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 집회로 평가된다. 러시아는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두고 교관과 고문을 철수했으며 한러 은행도 문을 닫았다.[2]
- 관민 공동회와 헌의 6조 - 10월 말 정부 대신들도 참석한 관민 공동회를 종로에서 열어 헌의 6조를 결의하고 고종에게 올렸다. 이 자리에서 백정 출신 박성춘이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치자고 연설해 박수를 받았다. 외국에 기대지 않고 황제권을 굳건히 할 것, 이권 계약은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함께 서명할 것, 재정은 탁지부가 맡고 예결산을 공개할 것 등이 담겼다.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고 중추원을 의회로 바꾸는 관제를 공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관민 공동회가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엿새 동안 열렸다고 적는다.
- 익명서 사건 - 의회 개원 하루 전인 11월 4일 밤, 수구파가 독립 협회가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는 익명서를 뿌렸다. 고종은 이상재 등 지도자 17명을 체포하고 독립 협회 해산령을 내렸다.
- 철야 시위 - 시민들이 경무청 앞에서 만민 공동회를 열고 밤샘 시위를 벌여 17명을 석방시켰다. 11월 21일 황국 협회가 동원한 보부상들이 몽둥이로 습격했으나 시민들이 다시 일어나 고종은 독립 협회 복설과 중추원 의관 임명을 약속했다.
- 해산 - 12월 중추원이 박영효 등을 대신 후보로 천거하자 고종은 군대를 동원했다. 12월 23일 시위대와 보부상이 만민 공동회를 해산시켰고, 25일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를 불법화하며 지도자 430여 명을 체포했다.
러시아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 세력 균형을 만들었고, 민중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새로운 운동 방식을 보여 주었다. 이때 활동한 청년들은 뒤의 애국 계몽 운동과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 ↑ 만민공동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 ↑ 세기말의 억눌린 꿈과 만민공동회, 월간 독립기념관 2019년 4월호, 독립기념관,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