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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 1876)은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이 강화부에서 맺은 조약으로, 정식 이름은 조일 수호 조규이며 조선이 처음 맺은 근대적 조약이자 해안 측량권과 영사 재판권을 내준 불평등 조약이다.

1876년 강화부에서 조약을 교섭하는 조선과 일본의 대표단

메이지 유신 뒤 일본은 조선에 새 국교를 요구했으나, 조선은 외교 문서(서계)의 형식이 예전과 다르다며 받지 않았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잡았으며, 박규수 등은 통상 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들어와 조선 포대의 포격을 일부러 끌어내고, 영종도를 공격해 약탈했다(운요호 사건). 일본은 이 일을 구실로 군함을 끌고 와 조약을 강요했고, 1876년 2월 3일(음력) 강화 연무당에서 조선 대표 신헌과 일본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가 12개조의 조약을 맺었다.[1]

  • 제1관 -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청의 종주권을 부정해 일본이 조선에 진출하기 쉽게 하려는 뜻이었다.
  • 제5관 - 부산 외에 두 항구를 더 연다. 경제적 목적의 부산(1876), 군사적 목적의 원산(1880), 정치적 목적의 인천(1883)이 차례로 열렸다.
  • 제7관 - 일본이 조선의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다. 군사 침략에 쓰일 수 있는 주권 침해 조항이다.
  • 제10관 - 개항장에서 일본인이 저지른 범죄는 일본 영사가 재판한다(영사 재판권, 치외 법권).
  • 조일 수호 조규 부록(1876년 7월) - 개항장에서 일본인이 다닐 수 있는 범위를 10리로 정하고, 일본인 거류지를 설정했으며,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를 쓸 수 있게 했다.
  • 조일 무역 규칙(1876년 7월) - 일본 상품에 관세를 매기지 않고, 일본 선박의 항세를 면제했으며, 조선 양곡을 제한 없이 수출할 수 있게 했다.
  • 조일 통상 장정(1883) - 관세를 물리고, 곡식이 모자랄 때 수출을 막을 수 있는 방곡령 조항을 두었다(→ 방곡령). 최혜국 대우도 들어갔다.
  • 개항 뒤 정부는 일본에 수신사(1876 김기수, 1880 김홍집)를 보내고,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두어 개화 정책을 폈다.
  • 개항장에는 감리서(1883)를 두어 개항장 행정과 외국인 관련 사무, 통상 사무를 맡겼다. 부산 감리서의 서기가 남긴 일기 『해은일록』에는 개항 뒤 부산의 변화가 담겨 있다.[2]
  • 일본 상인은 거류지를 중심으로 쌀과 콩을 사 가고 영국산 면제품을 되파는 중계 무역으로 이익을 냈다.
  • 이 조약을 본보기로 조선은 이후 서양 여러 나라와도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었다.

개항기 조약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내용 조약
운요호 사건이 계기, 해안 측량권, 영사 재판권, 3개 항구 개항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1876)
서양 나라와 맺은 첫 조약, 최혜국 대우 처음 규정, 거중 조정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 인정, 배상금 제물포 조약(1882, → 임오군란)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명시, 청 상인의 내지 통상권 처음 허용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 → 임오군란)
갑신정변 뒤 일본에 사과·배상, 공사관 신축비 한성 조약(1884, → 갑신정변)
선교사의 활동을 사실상 인정해 천주교 포교 허용의 근거가 됨 조불 수호 통상 조약(1886)
  1. ↑ 강화도조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
  2. ↑ 감리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