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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는 1911년 신민회 인사들이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세운 신흥 강습소에서 출발해 1919년 무관 학교로 확대된 독립군 양성 학교로, 1920년 문을 닫을 때까지 2,000여 명의 독립군 간부를 길러 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국권을 되찾을 길이 막히자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기로 했다. 1910년 말부터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와 이상룡 등이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옮겨 갔다. 1911년 4월 이들은 한인 자치 단체 경학사를 만들고, 청년들에게 민족의식과 군사 지식을 가르칠 신흥 강습소를 열었다. 첫 소장은 이동녕이었다.[1][2]

  • 신흥 강습소(1911) - 토착민의 배척과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자 사람이 드문 통화현 합니하로 옮겼다. 이석영이 땅을 팔아 낸 돈과 교사·학생의 노동으로 교사를 지었다.
  • 신흥 중학교(1913) - 본관이 완공된 뒤 신흥 중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차츰 군사반에 힘을 모았다.
  • 신흥 무관 학교(1919) - 3.1 운동 뒤 청년들이 몰려들자 1919년 유하현 고산자로 옮기며 신흥 무관 학교로 개편했다. 일본 육군 사관 학교 출신 지청천, 윈난 강무당 출신 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합류했다. 하사관반 3개월, 특별 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 과정을 두고 여러 곳에 분교를 운영했다.[1]
  • 폐교(1920) - 일제의 탄압과 마적의 습격, 흉작이 겹쳐 1920년 가을 문을 닫았다. 지청천은 생도들을 이끌고 백두산 쪽으로 들어가 홍범도 부대와 합류했다.

졸업생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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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 때까지 2,100여 명을 길러 냈다. 졸업생들은 서로 군정서와 북로 군정서에서 청산리 전투를 치렀고, 뒤에는 대한 통의부·정의부·신민부·국민부 같은 만주의 무장 단체에서 활동했다. 중국 관내에서는 의열단을 만든 단원 상당수와 한국광복군의 간부들이 이 학교 출신이었다.[1]

국외 독립군 양성 기관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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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곳 사실
서전서숙 북간도 용정 이상설이 세운 민족 교육 기관(1906)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서간도 삼원보 신민회의 이회영 형제·이상룡 등, 경학사와 함께 세움
대조선 국민군단 미국 하와이 박용만이 세운 군사 단체(1914)
대한 광복군 정부 연해주 이상설·이동휘 등(1914)
조선 혁명 간부 학교 중국 난징 김원봉이 세움(1932)
  1. ↑ 1.0 1.1 1.2 신흥무관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한민족독립운동사』 2권 국권수호운동 Ⅱ,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