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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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다 망명해 북간도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정사로 활동했으며, 연해주에서 13도 의군·권업회·대한 광복군 정부를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고 호는 보재이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겸 관장, 한성 사범 학교 교관 등을 지냈다. 1904년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그 부당함을 따지는 상소를 올렸고, 보안회를 이은 대한 협동회의 회장을 맡았다. 1905년 11월 의정부 참찬이 되었으나 을사늑약을 맺던 대신 회의에는 일본의 제지로 들어가지 못했다. 조약 뒤 고종에게 오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시민에게 연설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살아났다.[1]
- 서전서숙(1906) - 이동녕 등과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해 1906년 8월 민족 교육 기관인 서전서숙을 세우고 숙장이 되었다. 역사·지리·수학·국제법 등을 가르쳤다.
- 헤이그 특사(1907) - 고종의 특사로 이준·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갔다. 정사였다.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자 각국 대표에게 「공고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고, 이어 헐버트 등과 유럽과 미국을 돌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대한 제국 정부는 그에게 궐석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했다(헤이그 특사 사건).
- 한흥동(1909) -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지들과 밀산부 봉밀산 부근의 땅을 사서 10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세웠다.
- 13도 의군·성명회(1910) - 유인석·이범윤 등과 연해주의 의병을 모아 13도 의군을 편성했고, 국권 피탈 뒤에는 성명회를 조직해 병합 무효를 선언했다.
- 권업회(1911)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펴냈다.
- 대한 광복군 정부(1914) - 이동휘 등과 세운 망명 정부 성격의 단체에서 최고 책임자를 맡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직함을 정통령으로, 공훈전자사료관은 정도령으로 적는다.
- 신한 혁명당(1915) - 상하이에서 박은식·신규식 등과 신한 혁명당을 조직해 본부장이 되었다.[1][2]
1917년 3월 2일 니콜스크(지금의 우수리스크)에서 숨졌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