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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학교(五山學校)는 1907년 12월 이승훈이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오산에 세운 중등 교육 기관으로, 신민회의 민족 교육 운동을 대표하는 학교이다.

평안북도의 상인 출신 이승훈(1864~1930)은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의 교육 진흥 강연을 듣고 감동해 신민회에 들어가 평안북도 책임을 맡았다. 나라를 일으키려면 새 교육으로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믿은 그는 그해 고향 정주에 4년제 중등 과정의 오산 학교를 세웠다.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인명사전은 개교일을 12월 24일로 적는다. 처음 학생은 7명, 교사는 2명이었고, 수신·역사·지리·영어·산술·물리·창가·체조·군사 훈련 등을 가르쳤다.[1][2]

  • 성장(1908~1909) - 1908년 강명의숙을 오산 소학교로 고쳐 함께 두었고, 1909년 8월 오산 중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 교육에 힘썼다.
  • 105인 사건(1911) - 이승훈은 안악 사건으로 붙잡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05인 사건으로 다시 끌려가 옥고를 치렀다.[2]
  • 3.1 운동과 폐교(1919) - 이승훈은 기독교 대표로 민족 대표 33인에 들었고, 오산의 학생·졸업생·주민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제는 보복으로 교사(학교 건물)를 불태우고 학교를 닫게 했다. 1920년 9월 다시 문을 열었으며, 이 무렵 염상섭·김억 등이 교사로 있었다.
  • 오산 고등 보통학교(1926) - 1926년 11월 5년제 고등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교장 조만식이 정직·근면·질소를 강조하는 교훈을 정했다. 1930년 졸업생들이 교정에 이승훈의 동상을 세웠고, 이승훈은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유해를 학생들을 위한 표본으로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 광복 뒤 -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1953년 부산에서 다시 세웠고, 1956년부터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 자리 잡았다(오산 고등학교).[1]

애국 계몽 운동기의 학교 구별하기

편집 원본 편집
학교 세운 때·곳 세운 사람
원산 학사 1883, 원산 덕원·원산 주민(최초의 근대 사립 학교)
육영 공원 1886, 서울 정부(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
배재 학당 1885, 서울 아펜젤러
오산 학교 1907, 정주 이승훈(신민회)
대성 학교 1908, 평양 안창호(신민회)
신흥 강습소 1911, 서간도 삼원보 신민회 계열(→ 신흥 무관 학교)
  1. ↑ 1.0 1.1 오산고등학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1 확인.
  2. ↑ 2.0 2.1 이승훈, 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2026-10-21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