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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池靑天, 1888~1957)은 일본 육군 사관 학교를 나와 만주로 망명한 뒤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쌍성보·대전자령 전투를 이끌고,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지청천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고 호는 백산이다. 본명은 대형(또는 석규)이며, 독립운동에 나선 뒤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써서 이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대한 제국 육군 무관 학교에 들어갔다가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유학해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3·1 운동 뒤 일본군을 떠나 남만주로 망명했다. 망명과 졸업 시점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1919년과 1913년,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은 1920년 5월과 1914년 5월로 적는다.[1][2]

만주의 무장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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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흥 무관 학교 - 일본군의 병서와 군용 지도를 가지고 신흥 무관 학교에 들어가 교관으로 독립군 간부를 길렀고, 서로 군정서의 간부가 되었다.
  • 대한 독립군단과 자유시 - 1920년 청산리 전투 뒤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서일·김좌진 등과 대한 독립군단을 꾸렸다. 1921년 자유시 참변 뒤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임시정부 등의 구명으로 풀려났다.
  • 정의부 - 1925년 무렵 정의부의 군사 위원장 겸 사령관이 되었다.
  • 한국 독립군 - 1930년 북만주에서 한국 독립당 창당에 참여해 군사 위원장을 맡고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중국군과 한중 연합 작전을 펼쳐 1932년 쌍성보 전투, 1933년 6월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중국 관내와 한국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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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이후 중국 관내로 옮겨 뤄양 군관 학교 한인 특별반의 책임자로 한인 청년을 훈련했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세우자 총사령관이 되었고,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2] 딸 지복영과 아들 지달수도 광복군에서 활동했으며, 지복영은 오광심·조순옥 등과 함께 총사령부 선전 활동에 참여했다.[3]

1947년 4월 귀국해 청년 단체를 합친 대동 청년단을 만들었다. 1948년 5.10 총선거로 제헌 국회 의원이 되었고, 초대 무임소 장관과 제2대 국회 의원을 지냈다. 1949년 한국 민주당과 합쳐 민주 국민당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1957년 세상을 떠났고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무장 독립운동 지도자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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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인물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쌍성보·대전자령),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북로 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 전투 승리 김좌진 (→ 북로 군정서)
조선 혁명군을 이끌고 영릉가·흥경성 전투 승리 양세봉 (→ 조선 혁명군)
조선 의용대 창설, 광복군 부사령관 김원봉
  1. ↑ 1.0 1.1 지청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2.0 2.1 지청천(이달의 독립운동가), 공훈전자사료관, 국가보훈부, 2026-10-19 확인.
  3. ↑ 일본군과 맞서 싸운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독립기념관』 2019년 9월호, 독립기념관,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