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메뉴 여닫기
환경 설정 메뉴 여닫기
개인 메뉴 여닫기
로그인하지 않음
지금 편집한다면 당신의 IP 주소가 공개될 수 있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넘어옴)

6·25 전쟁(六二五戰爭, Korean War)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북위 38도선 전역에서 남침하면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한국 전쟁'이라고도 한다. 광복 뒤 남북에 따로 들어선 두 정부 가운데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이 무력 통일을 내세워 일으켰고, 국제 연합(유엔)의 결의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가 참전하면서 국제전으로 커졌다.[1]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밀렸으나,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혀 유엔군이 압록강 가까이 북진했다. 10월 말부터 중국군이 대규모로 개입하자 유엔군은 다시 물러나 1951년 1월 서울을 내주었고, 그해 봄 이후 전선은 지금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굳어졌다. 1951년 7월 시작된 휴전 회담은 포로 송환 문제로 2년을 끌었고, 그동안 고지를 둘러싼 소모전이 이어졌다.[1][2]

전쟁은 남북한 전체에 막대한 인명·물적 피해를 남겼고, 수많은 이산가족을 낳았으며, 분단을 굳혔다. 정전 협정은 전쟁을 멈춘 것일 뿐 평화 조약이 아니어서 남북은 지금도 법적으로 정전 상태에 있다. 국제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뒤 미국과 소련이 맞선 냉전이 처음으로 대규모 열전으로 번진 사건이었다.[1]

대한민국 정부와 국내 교과서는 전쟁이 일어난 날짜를 따서 '6·25 전쟁'이라 부른다. 학계와 언론에서는 영어 이름 Korean War를 옮긴 '한국 전쟁'도 함께 쓴다. 북한은 미국의 지배로부터 조국을 해방하는 전쟁이었다는 뜻으로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고, 정전을 승리로 기념해 평양에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을 두고 있다.[3] 중국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돕는 전쟁'이라는 뜻의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 부르는데, 참전 당시 내건 구호도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었다.[1][4] 일본에서는 '조선 전쟁'(朝鮮戦争)이라 부른다.

1943년 카이로 선언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고 약속했고,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이 이를 재확인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광복) 한반도는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는 군사적 편의에 따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 남쪽은 미군이 나누어 점령했다.[1][5] 같은 해 12월 미국·영국·소련 외상이 모인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는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를 세우고 미소 공동 위원회를 두며, 최장 5년의 신탁 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6] 이 결정이 '신탁 통치'로 알려지자 우익은 거세게 반탁 운동을 벌였고 좌익은 결정 지지로 돌아서 좌우 대립이 격해졌다.[7] 1946년 3월과 1947년에 열린 두 차례의 미소 공동 위원회는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할 단체의 범위를 두고 맞서다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8]

두 정부의 수립

편집 원본 편집

미국은 1947년 9월 한국 문제를 유엔에 넘겼다.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UNTCOK)의 감시 아래 총선거를 치르기로 결의했으나, 소련이 위원단의 38도선 이북 입국을 거부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가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면서, 5월 10일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치러졌다.[9]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쪽에서는 9월 김일성을 중심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12월 제3차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을 선거가 실시된 지역의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1] 소련군은 1948년 10월부터 철수했고, 미군도 1949년 6월 약 500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철수를 마쳤다.[1]

남북의 군사력

편집 원본 편집

북한은 소련군이 철수하던 1948년 10월까지 완전 무장한 4개 보병 사단과 소련제 T-34 전차를 갖춘 기갑 대대를 편성했다. 1949년 3월 소련과 비밀 군사 협정을 맺었고,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인 부대 2만 5,000명을 넘겨받았다. 개전 무렵 북한군은 10개 사단 13만 명을 38도선에 배치하고 후방에 예비 병력 10만 명을 두었다. 국군은 약 10만 명이었으나 전차와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고, 8개 사단 가운데 4개 사단은 후방에서 공산 유격대 토벌에 매달려 있었다.[1]

구분 국군 북한군
전차 없음 242대
곡사포·자주포 91문 728문
대전차포 140문 550문
박격포 960문 2,318문
항공기 연락기·연습기 22대 전투기·폭격기 등 211대

[1]

38도선 충돌과 개전 승인

편집 원본 편집

정부 수립 뒤 38도선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다. 특히 서해안 옹진 반도에서는 1949년 5월과 8월 남북이 번갈아 공격하는 큰 전투가 벌어졌고, 남북의 지도자 모두 무력 통일을 공공연히 말했다.[10][11]

김일성이 남침을 결심하고 소련과 중국의 승인을 얻어 낸 과정은 1990년대 소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1994년 러시아 정부가 한국에 넘긴 외교 문서와 대통령 문서고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남침 가능성을 물었다가 거절당했고, 8~9월에도 옹진 반도를 점령하는 제한 공격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1949년 9월 24일 북한군이 아직 강하지 않고 공격이 장기 내전으로 번지면 미국에 개입할 구실을 준다며 이를 거부했다.[10]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뒤 김일성은 1950년 1월 17일 소련 대사 시티코프에게 다시 스탈린을 만나 남침을 논의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스탈린은 1월 30일 전문에서 "그가 하려는 남조선에 관한 큰일은 대규모 준비가 필요하다", "너무 큰 위험이 없도록 조직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이 일에서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답했다. 같은 전문에서 스탈린은 해마다 납 2만 5,000톤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구체적인 준비를 논의했고,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5월 중순 베이징에 가서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었다.[10] 시티코프의 1950년 5월 12일 보고에 따르면 김일성은 베이징 주재 대사 이주연이 전한 마오쩌둥의 말을 옮겨, 마오쩌둥이 "평화적 방법으로는 통일할 수 없고 군사적 방법만이 필요하다", "미국인들은 그런 작은 땅 때문에 제3차 세계 대전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12]

국제 정세도 김일성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다. 1949년 10월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었고(국공내전), 1949년 6월 주한 미군 철수가 끝났으며,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 장관 딘 애치슨이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뺐다(애치슨 선언).[1][11] 북한은 1950년 4월 무력 통일 방침을 확정하는 한편,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제안하는 등 평화 공세로 침략 준비를 감추었다.[1]

날짜 사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38도선 전역에서 남침. 유엔 안보리 결의 82호
1950년 6월 27일 트루먼, 미 해·공군의 한국 지원 명령. 안보리 결의 83호
1950년 6월 28일 서울 함락, 한강 인도교·철교 폭파
1950년 7월 5일 미 지상군 오산에서 첫 전투
1950년 7월 7일 안보리 결의 84호(통합 사령부 설치)
1950년 7월 14일 이승만, 국군 작전 지휘권을 맥아더에게 이양
1950년 8월 1일 국군·유엔군 낙동강 방어선으로 후퇴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1950년 10월 1일 국군 38도선 돌파
1950년 10월 20일 유엔군 평양 점령
1950년 10월 하순 중국군 개입, 운산에서 국군·미군 포위
1950년 11월 27일~12월 11일 장진호 전투
1950년 12월 15~24일 흥남 철수
1951년 1월 4일 서울 재함락(1·4 후퇴)
1951년 3월 14일 서울 재수복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해임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 회담 시작
1951년 10월 25일 판문점에서 회담 재개
1952년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
1953년 3월 5일 스탈린 사망
1953년 6월 18일 반공 포로 석방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조인

[1][2]

남침과 서울 함락

편집 원본 편집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북한군은 새벽 4시 무렵 옹진에서 동해안까지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다.[2] 소련 대사 시티코프가 6월 26일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는 부대 집결이 6월 12일부터 23일까지 계획대로 이루어졌고 공격이 현지 시각 4시 40분에 시작되었으며, 사단급 작전 계획과 정찰에 소련 고문들이 참여했다고 적었다. 북한군 병사들에게는 남한군이 38도선을 넘어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반격'에 나선다는 정치 명령이 낭독되었다.[12]

북한군 전차가 의정부 쪽에서 밀고 내려와 6월 28일 새벽 서울 시내로 들어오자,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은 공병감 최창식에게 한강 다리 폭파를 명령했다. 28일 오전 2시 30분 무렵 한강 인도교와 철교 3개가 폭파되었고, 다리 위를 지나던 차량과 피란민이 크게 다쳤다. 국군 주력과 많은 시민이 강북에 남은 채 퇴로가 끊긴 이 일로 최창식은 1950년 9월 총살되었으나 1962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13]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7월 초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갔고, 점령지에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했다.[1]

유엔의 결의와 참전

편집 원본 편집

미국의 요청으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5일 결의 82호에서 북한의 무력 공격을 "평화의 파괴"로 규정하고 적대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했다. 소련 대표는 불참했고, 결의는 찬성 9, 기권 1(유고슬라비아)로 통과되었다.[14] 북한이 이를 무시하자 6월 27일 결의 83호는 회원국들이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도록 권고했다(찬성 7, 반대 1, 이집트·인도는 표결 불참).[15] 같은 날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미 해·공군에 한국군 지원을 명령했고,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보내 전쟁이 남쪽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1][16]

7월 7일 결의 84호는 회원국의 병력을 미국이 이끄는 통합 사령부 아래 두고, 미국이 사령관을 임명하며, 작전 중 유엔기를 함께 쓸 수 있게 했다(찬성 7, 기권 3).[17] 트루먼은 7월 8일 더글러스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했고, 7월 24일 도쿄에서 유엔군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3일 서한을 보내 '현 작전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맥아더에게 넘겼고, 이양은 7월 14일 자로 이루어졌다(대전 협정).[18] 일본에서 급히 건너온 미 제24사단의 선발대가 7월 5일 오산에서 처음 북한군과 싸웠으나 북한군의 남진을 막지 못했다.[19][1]

낙동강 방어선

편집 원본 편집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 낙동강 선까지 물러나, 마산·대구·포항을 잇는 방어선 안의 부산 교두보에서 버텼다. 이 지역은 국토의 약 10%에 지나지 않았다. 북한군은 부산 점령을 목표로 8월과 9월에 총공세를 폈지만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방어선이 무너지면 정부를 제주도로 옮기거나 해외에 망명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20] 전쟁 중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도의용군으로 나선 학생 가운데 실전에 투입된 사람이 2만 7,700여 명, 후방 지원에 나선 사람이 20만 명에 이르렀다.[21]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

편집 원본 편집

맥아더는 서울 함락 직후부터 북한군의 보급선 뒤를 치는 상륙 작전을 구상했다. 미국 합동 참모 본부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해안 조건이 나쁜 인천은 상륙에 부적합하다며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북한군 주력이 낙동강에 몰려 인천 방어가 허술하고 수도를 빨리 되찾는 심리적 효과가 크다며 밀어붙였다.[1]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함정 261척과 지상군 7만여 명이 월미도와 인천에 상륙했다. 상륙 부대인 미 제10군단에는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과 한국 해병대·국군 제17연대가 속했다. 병력이 모자란 미 제7사단은 한국 청년 8,000여 명을 뽑아 일본에서 훈련시킨 뒤 배치했는데, 이것이 카투사(KATUSA)의 시작이다.[22] 같은 무렵 동해안에서는 학도병이 주축인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 772명이 9월 14일 부산에서 수송선 문산호를 타고 떠나 경상북도 영덕 장사리 해안에 상륙했다.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고 적의 눈을 동해안으로 돌리려는 양동 작전이었으며, 문산호가 좌초한 가운데 많은 대원이 죽거나 다쳤다(장사 상륙 작전). 장사리 해변에는 문산호를 재현한 전승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상륙군은 김포 비행장과 영등포를 차례로 장악하고 한강을 건너 연희동·마포·남산 세 방면에서 시가전을 벌인 끝에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다. 보급선이 끊긴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무너져 북쪽과 산악 지대로 흩어졌다.[23]

국군은 10월 1일 38도선을 넘었다. 10월 7일 유엔 총회는 찬성 47, 반대 5, 기권 7로 한국의 통일·독립·민주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유엔 한국 통일 부흥 위원단(UNCURK)을 두었으며, 이로써 유엔군의 북진이 본격화했다. 국군 제1군단은 10월 10일 원산을, 미 제8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했다. 한국군 제6사단 일부는 압록강 가 초산에 이르렀고, 11월 21일에는 국군이 혜산까지 진출했다.[1]

중국군의 개입

편집 원본 편집

중국은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으면 방관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그러나 10월 15일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을 만난 맥아더는 중국군이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전쟁은 추수 감사절 무렵 끝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중국군은 '지원군'(志願軍)이라는 이름으로 그 직후부터 압록강을 건너왔고, 10월 24~26일 운산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을 포위했다.[1] 유엔군이 11월 24일 총공세를 재개하자 중국군은 11월 25~26일 대병력으로 서부 전선을 공격해 방어선을 무너뜨렸고, 맥아더는 11월 28일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고 유엔에 보고했다. 12월 초 평양은 다시 공산군의 손에 넘어갔다.[1]

동부 전선에서는 장진호 북쪽으로 나아가던 미 제1해병사단이 11월 27일부터 중국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에 포위되었다. 해병대는 영하의 추위 속에서 유담리·하갈우리·고토리를 거치며 포위망을 뚫고 12월 11일 함흥으로 철수했다. 중국군 제9병단도 큰 손실을 입어 3개월 동안 재편성에 들어갔다(장진호 전투).[24] 원산이 넘어가 육로가 막힌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10만 5,000여 명은 12월 15일부터 23일(해군 기준 24일)까지 흥남항에서 배로 철수했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처음에 장비 수송 때문에 피란민을 태우기 어렵다고 했으나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과 통역 현봉학의 설득으로 남는 공간에 피란민을 태우기로 했다. 흥남에 모인 피란민 30만 명 가운데 9만 1,000여 명이 배를 탔고, 전차 상륙함(LST) 한 척에 정원의 10배가 넘는 5,000여 명이 오르기도 했다(흥남 철수).[25]

1·4 후퇴와 재반격

편집 원본 편집

중국군은 1950년 12월 말 38도선을 넘었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함락되었다. 정부와 많은 시민이 다시 남쪽으로 피란했는데, 첫 후퇴와 달리 이번에는 미리 세운 작전 계획에 따라 비교적 질서 있게 물러났다.[26] 이 후퇴 과정에서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는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 설치법'으로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 50만여 명을 소집해 남쪽으로 옮겼는데, 간부들이 예산과 물자를 빼돌려 식량과 옷을 받지 못한 장정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숨졌다. 사망자는 9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사령관 김윤근 등 간부 5명이 사형에 처해졌고,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을 해산했다.[27]

유엔군은 1951년 1월 25일 반격을 시작해 3월 14일 서울을 다시 되찾고 3월 24일 38도선을 넘었다. 유엔 총회는 2월 1일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를 채택했다.[1] 그동안 맥아더는 만주 폭격, 중국 해안 봉쇄, 대만 국민당군 투입을 주장하며 확전을 피하려는 트루먼 정부와 맞섰다. 3월 24일 본국과 상의 없이 중국에 위협 성명을 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트루먼은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하고 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를 후임으로 임명했다.[1] 1951년 4월과 5월 중국군은 대병력으로 춘계 공세를 폈으나, 전선은 점차 38도선 부근에서 교착되었다.[1]

피란 수도 부산

편집 원본 편집

정부는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7일까지, 그리고 1·4 후퇴 뒤인 1951년 1월부터 1953년 8월 서울 환도 때까지 부산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피란민이 몰린 부산에는 판잣집이 들어섰고, 서울 등지에서 내려온 학교들은 천막 교실을 세워 수업을 이어 갔으며 1951년에는 여러 대학이 모인 전시 연합 대학이 문을 열었다. 1952년 5월 이승만 정부는 부산 일대에 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연행하는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킨 끝에, 7월 4일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 개헌안을 기립 표결로 통과시켰다.

휴전 회담과 고지전

편집 원본 편집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가 휴전 협상을 제의했고, 7월 10일 개성 내봉장에서 본회의가 열렸다. 공산군 측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고 했고 유엔군 측은 당시의 접촉선을 주장했다. 회담은 8월 22일 중단되었다가 10월 25일 판문점에서 다시 열렸고, 11월 27일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남북으로 각각 2km씩 비무장 지대를 두는 데 합의했다.[2] 회담과 전투는 함께 진행되었다. 양측은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단장의 능선, 백마고지 같은 고지를 두고 뺏고 빼앗기는 싸움을 2년 가까이 되풀이했다.

포로 송환 문제와 반공 포로 석방

편집 원본 편집

가장 오래 걸린 쟁점은 포로 송환이었다. 유엔군 측은 포로 각자가 한국·북한·중국·대만 가운데 갈 곳을 고르게 하는 '자유 송환'을, 공산군 측은 모든 포로를 원래 나라로 돌려보내는 '강제 송환'을 주장했다. 1952년 4월 유엔군 사령부의 조사에서 민간인 억류자를 포함한 공산군 포로 약 17만 명 가운데 10만 명이 자유 송환을 원한 것으로 나타나자 공산군 측은 더욱 강하게 반발했다.[2] 포로수용소 안에서도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가 맞섰다. 1952년 2월 거제도 제62수용소에서 충돌로 포로 77명이 숨졌고, 5월 7일에는 친공 포로들이 수용소장 돗드 준장을 납치했다.[28] 회담은 1952년 10월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

1952년 11월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자 협상이 급진전했다. 4월 20~26일 다치거나 병든 포로를 먼저 교환했고, 6월 8일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에 맡기는 포로 송환 협정이 맺어졌다.[2] 휴전에 반대하며 북진 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6월 18~19일 헌병 사령관 원용덕에게 명해 부산·광주·논산 등 8개 수용소에서 반공 포로를 탈출시켰다. 수용 인원 3만 5,698명 가운데 2만 7,388명이 빠져나갔고 56명이 탈출 중 숨졌다. 주민들은 탈출한 포로를 숨겨 주어 미군의 재수용은 거의 불가능했다(반공 포로 석방).[29]

미국은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을 보내 이승만을 설득했고, 이승만은 7월 11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교섭, 장기 경제 원조, 한국군 증강 지원 등을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했다.[1]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 대표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이 협정문에 서명했고, 이어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가 각자의 후방 사령부에서 서명했다. 대한민국 대표는 휴전에 반대한다는 뜻으로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휴전 회담은 2년 17일 만에, 전쟁은 3년 1개월 2일 만에 멈추었다(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2] 정전 뒤인 1954년 4~6월 제네바에서 열린 정치 회담은 한반도 통일 문제에서 아무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1]

6·25 전쟁의 인명 피해는 기관과 연구자마다 수치가 크게 다르고, 북한과 중국 쪽은 믿을 만한 공식 통계가 부족하다.[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통계(2023)는 다음과 같다.

구분 사망 부상 실종·포로 계 비고
국군 138,418 450,742 32,838 621,998
유엔군 40,803 103,460 9,769 154,032 미군 사망 36,574
북한군 508,797~522,000 - 98,599~120,000 607,396~801,000 출처(『한국전란 4년지』, 군사정전위 편람, 미군 자료)에 따라 다름
중국군 148,600 798,400 25,600 972,600 한국 측 추정, 부상에 질병 입원 포함

[19] 중국은 1980년대에 사상자를 36만 명이라고만 밝혔고, 2010년 중국 국방대학 쉬옌(徐焰) 소장은 전투와 사고로 11만 4,084명이 죽고 2만 5,621명이 실종되었으며 약 7만 명이 부상·질병 등으로 숨졌고, 민정 부문에 등록된 '열사'가 18만 3,108명이라고 밝혔다.[4]

남한 민간인 피해는 내무부 통계국 집계(1955)로 99만 968명이며, 사망 24만 4,663명, 학살 12만 8,936명, 부상 22만 9,625명, 납치 8만 4,532명, 행방불명 30만 3,212명이다. 학살 피해는 전라남도(6만 9,787명)에 가장 많이 몰려 있다.[19] 북한 민간인 피해는 약 200만 명으로 추정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여러 자료를 종합해 남북한을 합친 한국인의 인명 손실을 520만 명 선으로 본다.[1] 피란민은 1951년 3월 현재 650만 명을 넘었다.[19] 전쟁 중 약 29만 명이 월북하거나 납북되었고 45만~65만 명이 월남한 것으로 추정되며, 흩어진 이산가족은 흔히 1,000만 명 규모로 말한다.[1]

북한은 1949년과 견주어 광업 생산력의 80%, 공업 생산력의 60%, 농업 생산력의 78%가 줄었고, 민가 60만 채와 학교 5,000개, 병원 1,000개가 파괴되었다. 남한에서는 공장 약 900개와 가옥 약 60만 채가 부서지고 철도 시설의 약 47%, 발전 시설의 약 80%가 손상되었으며, 휴전 직후 집을 잃은 전재민이 200만여 명에 이르렀다.[1]

전쟁 동안 전선이 남북으로 여러 차례 오가면서 군경, 점령군, 좌우익 단체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 국민보도연맹 사건: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정부가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며 만든 관변 단체로, 가입 할당과 강제 가입으로 좌익과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연맹원이 약 30만 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일어나자 경찰과 육군 특무대(CIC) 등은 연맹원을 소집·구금했고, 후퇴하면서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했다. 희생자는 수만 명에서 2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되며, 유족은 1990년대까지 연좌제로 감시와 불이익을 받았다.[30]
  • 노근리 사건: 1950년 7월 25~29일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 쌍굴다리 일대에서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가 북한군이 피란민 속에 숨어 있다며 피란민에게 폭격과 사격을 가한 사건이다. 1999년 9월 29일 미국 AP 통신의 보도로 널리 알려졌고,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되어 사망 150명, 행방불명 13명, 후유 장애 63명이 희생자로 인정되었다.[31]
  • 거창 사건: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공비 토벌에 나선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가 주민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2월 11일 신원국민학교에 모은 주민 가운데 군인·경찰·공무원 가족을 돌려보낸 뒤 이튿날 박산골에서 총살했고, 이를 포함해 이 기간 희생된 주민은 15세 이하 어린이 359명을 포함한 719명이었다. 3월 29일 국회에서 공개되었으나, 국회 조사단은 공비로 가장한 군인들의 총격을 받고 현장에 가지 못했다.[32]
  • 북한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 북한은 점령지에서 인민재판이라는 형식으로 숙청을 벌이며 공포 정치를 폈다.[1] 1955년 정부 통계는 남한 민간인 피해 가운데 '학살'을 따로 집계해 12만 8,936명으로, '납치'를 8만 4,532명으로 적었다.[19]

이런 사건은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으로 설립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2010년 신청 사건 1만 860건을 조사했고, 전국 13곳에서 민간인 희생자 유해 1,617구를 발굴했다. 위원회는 2020년 법 개정으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33]

전쟁은 분단을 군사분계선과 비무장 지대로 굳혔고, 남북은 서로를 증오하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 남북 모두에서 중도적 이념은 설 자리를 잃었다.[1]

  • 대한민국: 반공이 국가 질서의 중심이 되었다.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처럼 중간 노선을 걷던 정치인 상당수가 납북되거나 월북하면서 협상 노선은 정치 세력으로 모이기 어려워졌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200만 표 넘게 얻은 조봉암의 진보당이 1958년 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되고 1959년 조봉암이 처형된 것은 반공 질서가 굳어졌음을 보여 준다(진보당 사건, 2011년 대법원 재심 무죄).[1][34] 군대는 미국의 지원으로 급격히 커져 다른 사회 세력보다 앞서 성장했다. 1953~1961년 미국은 22억 8,000만 달러를 원조했는데, 원조가 소비재와 양곡 중심이어서 소비재 경공업 중심의 공업화로 이어졌다.[1]
  • 북한: 김일성은 전쟁 책임을 다른 파벌에 돌리며 권력을 다졌다. 1950년 12월 연안파 군사 지도자 무정을 숙청했고, 정전 직후인 1953년 8월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을 '미제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으며, 1956년 연안파와 소련파를 몰아내 1958년 초까지 유일 체제를 세웠다. 반미주의가 사회 깊이 자리 잡았고, 전후 복구는 1959년 시작된 천리마 운동 같은 주민 노력 동원으로 추진되었다.[1]
  • 한미 동맹: 이승만은 휴전 동의의 조건으로 방위 조약을 요구했다. 1953년 8월 7일 덜레스 국무 장관이 서울에서 가조인했고, 10월 1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조인되어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다. 조약은 대한민국이 외국과 맺은 처음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군사 동맹 조약이다.[35] 국군의 작전 통제권은 정전 뒤에도 유엔군 사령관에게 남았고, 1994년 평시 작전 통제권만 한국군에 돌아왔다.[18]
  • 냉전의 격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전쟁으로 미국이 군사력을 크게 늘려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굳혔고, 미소 냉전이 구조화되었다고 본다. 미국 안에서는 매카시즘의 반공 열풍이 일었고, 미국은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 같은 반공 집단 안보 체제를 넓혀 갔다.[1]
  • 중국과 대만: 중국은 유엔에 의해 '침략자'로 규정되어 유엔 가입이 더 늦어졌지만, 아시아 문제에서 발언권을 인정받았고 국내에서는 마오쩌둥 체제가 강화되었다.[1] 1949~1950년 초 미국은 중국 공산군이 대만을 점령하는 것을 내버려 둘 생각이었으나, 전쟁이 일어나자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보냈다. 중국 공산당은 대만 공격에 쓰려던 병력을 한반도로 돌렸고, 대만 해협의 충돌은 미루어졌다.[16]
  • 일본: 일본은 미군의 군수 물자 주문으로 경제 부흥의 계기를 얻었다.[1] 전쟁으로 일본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자 미국은 일본의 국제 사회 복귀를 서둘렀고,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이 같은 날 서명되었다.[5]

유엔 결의에 따라 16개국이 전투 부대를, 5개국이 의료 지원 부대를 보냈다. 참전 규모는 34만 1,628명이며 그 가운데 미군이 30만 2,483명이었다.[18][19]

구분 나라 (사망자)
전투 부대 파견(16개국) 미국(36,574), 영국(1,106), 튀르키예(900), 캐나다(516), 오스트레일리아(340), 프랑스(269), 콜롬비아(213), 그리스(194), 태국(136), 네덜란드(125), 에티오피아(122), 필리핀(112), 벨기에(106), 뉴질랜드(45), 남아프리카 공화국(37), 룩셈부르크(2)
의료 지원(5개국)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사망자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2023)이며, 의료 지원국 가운데 인도는 3명, 노르웨이는 3명이 사망했다.[19] 공산군 측에서는 북한군과 중국 인민 지원군이 싸웠다. 소련은 지상군을 보내지 않았지만 무기와 군사 고문을 보냈고, 공군 부대를 중국 쪽에 배치해 지원했다.[12]

전쟁이 누구의 책임으로, 왜 일어났는지는 냉전 내내 논쟁거리였다. 국내외의 '전통주의' 해석은 스탈린이 기획하고 김일성이 실행한 공산 진영의 침략으로 보았다. 1980년대 이후 브루스 커밍스 등 '수정주의' 연구자들은 해방 뒤 남한 내부의 좌우 갈등과 1949년 옹진 등지의 38도선 충돌을 강조하며 전쟁을 내전의 연장으로 보았고, 북한이 소련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스스로 행동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10][11]

1994년 러시아가 한국에 넘긴 소련 문서는 이 논쟁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문서를 분석한 캐스린 웨더스비는 남침의 주도권이 분명히 김일성에게 있었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승인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고 여겼으며, 스탈린이 1949년의 거부를 뒤집고 1950년 초 승인한 것은 '바뀐 국제 정세'에 대한 자신의 계산 때문이었다고 정리했다.[10] 커밍스는 공개된 문서가 방대한 자료 가운데 일부만 골라 낸 것이며, 남북 지도자 모두 상대를 치려 했고 소련과 미국 모두 이들을 말렸다는 점, 옹진 전투처럼 남쪽의 공격도 있었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11] 공개된 문서로 김일성이 여러 차례 승인을 요청한 끝에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전면 남침을 준비한 과정은 확인되었고, 해석의 쟁점은 스탈린이 마음을 바꾼 이유와 1949년 이전 내전적 충돌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옮겨 갔다.[10][11] 남한이 먼저 북침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북한군 병사들에게 '반격' 명령으로 전달된 선전이었음이 시티코프 보고로 드러났다.[12]

통계와 평가의 차이

편집 원본 편집

인명 피해는 피해 항목에서 보듯 같은 국방부 계열 자료 안에서도 출처마다 차이가 크다. 국군 손실을 유엔군 쪽은 25만 7,000여 명, 공산군 쪽은 58만 6,000여 명으로 발표했고, 일본의 『통일조선신문』은 98만 8,403명으로 추정했다.[1]

  • 스탈린의 납 요구: 1950년 1월 30일 남침을 돕겠다고 답한 스탈린의 전문은 같은 글에서 북한에 해마다 납 2만 5,000톤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웨더스비는 이를 스탈린이 물질적 이득을 따지는 방식의 전형으로 보았고, 커밍스는 미국이 한국의 텅스텐을 요구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반박했다.[10][11]
  • 맥아더의 증언: 맥아더는 1951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평생을 전쟁 속에서 보낸 자신도 이런 참상은 처음이어서 수많은 시체를 보고 구토했다고 말했다.[1]

6·25 전쟁은 한국 현대 문학의 가장 큰 주제 가운데 하나다. 장용학의 「요한 시집」(1955), 하근찬의 「수난 이대」(1957),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최인훈의 『광장』, 홍성원의 『남과 북』,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36] 윤흥길의 중편 「장마」는 국군 아들을 잃은 외할머니와 빨치산 아들을 둔 친할머니의 갈등과 화해를 소년의 눈으로 그렸다.[37] 가수 현인은 전쟁 중 군예대로 활동하며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를 불렀고, 흥남 철수와 피란살이를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로 인기를 얻었다.[38]

제목 개봉 감독 내용
맛슈(M*A*S*H) 1970년(미국), 국내 1971년 1월 29일 로버트 올트먼(KOBIS 표기 '로버트 알트만') 6·25 전쟁 중 미군 이동 야전 병원의 외과 의사들을 그린 풍자 코미디[39]
태극기 휘날리며 2004년 2월 5일 강제규 전쟁에 함께 끌려간 형제(장동건·원빈)의 이야기[40]
웰컴 투 동막골 2005년 8월 4일 박광현 1950년 11월 강원도 산골 마을에 모인 국군·인민군·연합군 병사들[41]
작은 연못 2010년 4월 15일 이상우 노근리 사건을 처음 영화로 만든 작품[42][43]
포화 속으로 2010년 6월 16일 이재한 포항에서 싸운 학도병 71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함[44]
고지전 2011년 7월 20일 장훈 휴전 협상 중 동부 전선 고지를 두고 벌어진 소모전[45]
국제시장 2014년 12월 17일 윤제균 흥남 철수 때 부산 국제시장으로 내려온 피란민 덕수(황정민)의 일생[46]
인천상륙작전 2016년 7월 27일 이재한 인천 상륙 작전 직전의 첩보 작전[47]
  1. ↑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1.28 1.29 1.30 1.31 1.32 1.33 1.34 1.35 1.36 1.37 한국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 ↑ 2.0 2.1 2.2 2.3 2.4 2.5 2.6 휴전회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 ↑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4. ↑ 4.0 4.1 180,000 Chinese soldiers killed in Korean War, says Chinese general, China Daily(china.org.cn 전재), 2010-06-28.
  5. ↑ 5.0 5.1 Korean War and Japan's Recovery, Milestones in the History of U.S. Foreign Relations, 미국 국무부 역사실(Office of the Historian), 2026-10-16 확인.
  6. ↑ 모스크바 삼상회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7. ↑ 신탁통치 반대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8. ↑ 미소공동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9. ↑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10. ↑ 10.0 10.1 10.2 10.3 10.4 10.5 10.6 Kathryn Weathersby, "To Attack, or Not to Attack? Stalin, Kim Il Sung, and the Prelude to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5(1995 봄), 1~9쪽, 우드로 윌슨 센터, 2026-10-16 확인.
  11. ↑ 11.0 11.1 11.2 11.3 11.4 11.5 Bruce Cumings, "Cumings and Weathersby: An Exchange"(1995-07-11 편지),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6-7(1995/1996 겨울), 120~121쪽, 우드로 윌슨 센터, 2026-10-16 확인.
  12. ↑ 12.0 12.1 12.2 12.3 Kathryn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6-7(1995/1996 겨울), 30~84쪽, 우드로 윌슨 센터, 2026-10-16 확인.
  13. ↑ 한강교 폭파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14. ↑ S/RES/82(1950),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2호, 1950-06-25, 2026-10-16 확인.
  15. ↑ S/RES/83(1950),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3호, 1950-06-27, 2026-10-16 확인.
  16. ↑ 16.0 16.1 The Taiwan Straits Crises: 1954-55 and 1958, Milestones in the History of U.S. Foreign Relations, 미국 국무부 역사실, 2026-10-16 확인.
  17. ↑ S/RES/84(1950),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4호, 1950-07-07, 2026-10-16 확인.
  18. ↑ 18.0 18.1 18.2 유엔군 사령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19. ↑ 19.0 19.1 19.2 19.3 19.4 19.5 19.6 전쟁 속의 통계, 6·25전쟁 주제 기록, 국가기록원, 2026-10-16 확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통계자료집』(2023)과 내무부 통계국 『대한민국 통계연감』(1955)을 옮긴 표)
  20. ↑ 낙동강 방어선 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1. ↑ 학도의용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2. ↑ 인천상륙작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3. ↑ 9·28 서울 수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4. ↑ 장진호전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5. ↑ 흥남철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6. ↑ 1·4후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7. ↑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8. ↑ 거제도 포로 소요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29. ↑ 반공포로 석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0. ↑ 국민보도연맹(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1. ↑ 이재윤, 17년 전 오늘…'노근리 학살' 세계에 알려지다, 머니투데이, 2016-09-29.
  32. ↑ 거창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3.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4. ↑ 진보당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5. ↑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6. ↑ 전쟁문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7. ↑ 장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8. ↑ 현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39. ↑ 맛슈, KOBIS, 2026-10-16 확인.
  40. ↑ 태극기 휘날리며, KOBIS, 2026-10-16 확인.
  41. ↑ 웰컴 투 동막골, KOBIS, 2026-10-16 확인.
  42. ↑ 작은 연못, KOBIS, 2026-10-16 확인.
  43. ↑ 작은 연못,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6-10-16 확인.
  44. ↑ 포화속으로, KOBIS, 2026-10-16 확인.
  45. ↑ 고지전, KOBIS, 2026-10-16 확인.
  46. ↑ 국제시장, KOBIS, 2026-10-16 확인.
  47. ↑ 인천상륙작전, KOBIS, 2026-10-16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