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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北伐論)은 병자호란 뒤 조선에서 중원을 차지한 청을 쳐서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 명 중심의 질서를 되살리자고 한 주장으로, 효종 때 송시열·이완 등을 중심으로 나라 차원의 군비 확충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병자호란(1636~1637)에서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데 이어 1644년 명이 무너지고 청이 베이징에 들어가자, 조선 지배층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남쪽에 명의 잔존 세력이 남아 있어 명이 곧 회복되리라는 기대가 컸고, 그때 조선이 힘을 보태 청을 치자는 북벌론이 나왔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데 대한 보은 의식도 바탕에 있었다.[1]

효종의 북벌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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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도 세력 - 청에 인질로 다녀온 효종이 즉위(1649)하자 북벌을 국가 계획으로 삼았다. 원두표·이완 같은 무신 측근을 중용하고, 김상헌·송시열·송준길 등 산림 세력을 불러들였다.
  • 군비 확충 - 어영청을 크게 늘리고 대포 부대를 두었으며, 수어청을 고쳐 남한산성 방어를 보강하고, 금군을 정비했다. 강화도 해안에는 진과 보를 쌓았다. 다만 이 조치들은 대부분 중앙군 강화와 방어에 치우쳐 있었다.
  • 송시열의 입장 - 송시열은 1649년 「기축봉사」에서 북벌의 당위를 말하면서도, 형세를 살펴 서서히 준비하고 먼저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했다.[1]
  • 반대와 한계 - 잇따른 흉년과 백성의 부담, 문신과 무신의 갈등, 김육 등 실무 관료의 반대가 겹쳤다. 청은 조선의 사정을 꿰뚫고 있었고, 조선은 오히려 청의 요청으로 두 차례 나선 정벌(1654·1658)에 조총군을 보내야 했다. 『현종실록』의 이완 졸기는 효종이 송시열과 세운 계획을 송시열을 보내 이완에게 알리자 이완이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고 전한다.[2]

1659년 효종이 죽자 북벌 계획은 사실상 멈췄다. 숙종 초 중국에서 삼번의 난(1673~1681)이 일어나자 윤휴 등이 다시 북벌을 주장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명의 회복 가능성이 사라진 17세기 말 이후 북벌론은 주로 재야에서 말해지는 명분이 되었고, 대명 의리를 기리는 상징으로 남았다. 18세기 후반에는 오히려 청의 앞선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론이 등장했다.[1]

북학론과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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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북벌론 북학론
시기 17세기 중엽, 효종 때 절정 18세기 후반, 영조·정조 때
청을 보는 눈 무력으로 쳐야 할 오랑캐 문물을 배워야 할 나라
대표 인물 효종, 송시열, 이완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관련 사실 어영청 확대, 나선 정벌 『열하일기』, 『북학의』
  1. ↑ 1.0 1.1 1.2 북벌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28 확인.
  2. ↑ 『현종실록』 권22, 현종 15년(1674) 6월 14일 「우의정 이완의 졸기」, 한국고전종합DB, 2026-10-28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