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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한국 최초의 일본·미국 유학생으로, 거문도 사건 무렵 조선 중립화론을 내놓고 『서유견문』을 지어 서양 근대 문명을 소개했으며 갑오개혁에 참여한 개화사상가이자 정치인이다.

만년의 유길준

호는 구당이다. 젊어서 박규수의 문하에서 김옥균·박영효·김윤식 등과 함께 실학과 해외 사정을 배웠다. 1881년 조사 시찰단의 어윤중을 따라 일본에 가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 의숙에서 공부해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1883년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그대로 남아 생물학자 모스의 지도를 받고 담머 고등학교에 다녀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그만두고 유럽을 거쳐 1885년 12월 귀국했으나, 정변 주도자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붙잡혀 1892년 무렵까지 연금되었다.[1]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다툼이 커졌다. 유길준은 귀국 무렵 「중립론」을 써서, 유럽의 벨기에와 불가리아처럼 열강이 함께 보장하는 중립국이 되어야 조선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했다. 실현할 방법으로는 청이 앞장서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 등 관련 열강을 불러 모으고 조선도 참여해 조약을 맺자고 했다. 같은 무렵 독일 부영사 부들러도 조선의 영세 중립을 건의했으나, 청의 간섭이 강해지면서 중립화론은 실현되지 않았다.[2]

연금 중에 쓴 『서유견문』은 1889년 무렵 원고를 마치고 1895년 일본 도쿄에서 간행되었다. 국한문 혼용체로 쓴 20편의 책으로, 세계 지리에서 시작해 국권·국민·정부·교육·법률·화폐·상업 등 서양의 근대 제도를 소개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주체적 개화인 '실상 개화'를 주장하고, 역사가 미개화·반개화·개화의 단계를 거쳐 나아간다고 보았으며, 군주와 백성이 함께 다스리는 입헌 군주제(군민공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 개혁론은 갑오개혁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1][3]

갑오개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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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오·을미개혁 - 1894년 군국기무처 회의원으로 개혁을 이끌었고, 1895년 을미사변 뒤 내부대신으로 단발령을 강행해 유생과 백성의 반감을 샀다.
  • 망명 - 1896년 아관 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무너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 계몽 운동 - 1907년 귀국한 뒤 흥사단 부단장, 한성부민회 회장으로 교육과 산업 진흥에 힘썼고, 1909년 국어 문법서 『대한문전』을 펴냈다. 국권 피탈 뒤 일제가 준 남작 작위를 거부했다.[1]

개화 정책 관련 사실 구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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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때
김홍집이 2차 수신사로 다녀오며 조선책략을 들여옴 1880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다녀옴 1881년
김옥균 등이 개화당 정부를 세움 (갑신정변) 1884년
유길준이 조선 중립화론을 내놓음 1885년 무렵(거문도 사건 직후)
이상설 등이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감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
  1. ↑ 1.0 1.1 1.2 유길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10-19 확인.
  2. ↑ 김종학, 「한반도 공동보장 구상의 역사적 기원: 19세기 벨기에·불가리아의 사례와 유길준의 「중립론」」,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2026-10-19 확인.
  3. ↑ 이용재, 「도서관 인물탐구: 유길준」, 『도서관계』 2006년 10월호, 국립중앙도서관, 2026-10-19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