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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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李儁, 1859~1907)은 보안회·헌정 연구회·국민 교육회 등을 이끈 애국 계몽 운동가이자 법관으로, 1907년 헤이그 특사의 부사로 파견되어 헤이그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 독립 협회 - 백과사전과 인명사전은 1898년 독립 협회에 가입해 만민 공동회에서 활동했다고 적는다.[3] 반면 우리역사넷 연대기는 공식 참여 기록은 없고 뒷날 회원으로 기억되었을 뿐이라고 본다.[2]
- 보안회(1904) -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송수만 등과 보안회를 조직해 총무를 맡았다. 보안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대한 협동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고 반대 운동을 이어 가 요구를 막아 냈다.[3]
- 공진회와 유배 - 1904년 12월 일진회에 맞서 공진회를 조직해 회장이 되었고, 그 때문에 황해도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3]
- 헌정 연구회(1905) - 1905년 5월 윤효정·양한묵 등과 입헌 정치를 연구하는 헌정 연구회를 세웠다. 을사늑약 뒤에는 상동 교회에 모인 동지들과 조약 폐기 상소와 시위를 벌였다.[3]
- 계몽 운동 - 1906년 국민 교육회 회장을 맡아 보광 학교를 세웠고, 고향의 한북 흥학회도 조직했다. 1907년에는 대한 자강회 평의원으로 활동하고, 서울에 국채 보상 연합회의소를 세워 소장으로서 국채 보상 운동을 전국으로 넓혔다.[1] 백과사전은 같은 해 4월 신민회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했다고 적는다.[3]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이준은 고종에게 특사 파견을 건의했다. 4월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사 이상설과 만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해 6월 25일 헤이그에 닿았다. 그러나 일본 등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자, 세 특사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밝힌 공고사를 각국 대표와 언론에 돌렸다.[3] 이준은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숨졌다.[1]
죽음의 원인은 엇갈린다. 『대한매일신보』 호외는 분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배를 갈랐다고 전했고, 현지 신문과 일본 측 보고는 얼굴 종기 수술 뒤 감염 때문이라고 했다. 1956년 국사편찬위원회의 현지 조사는 할복 자결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2] 유해는 헤이그 시립 묘지에 묻혔다가 1963년 서울 수유리로 옮겨졌다. 정부는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