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편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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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1925년 조선 총독부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국사를 편찬하려고 총독 직속 기관으로 세운 역사 편찬 기구로, 1938년까지 사료집 『조선사』를 펴냈다.
일제는 강점 직후부터 한국의 옛 관습을 조사하며 1915년 중추원에 편찬과를 두고 『조선반도사』를 쓰려 했으나 진척이 없었다. 3·1 운동으로 민족의식이 높아지자, 문화 통치를 내세우던 일제는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누르기 위해 한국사 서술을 직접 주도하기로 했다. 1923년 12월 조선사 편찬 위원회 규정을 공포해 위원회를 꾸렸고, 1925년 6월 칙령으로 조선사 편수회 관제를 공포해 독립 관청으로 격상했다. 회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고, 일본인 학자와 이완용·권중현 같은 친일 인사, 일부 한국인 학자가 고문·위원·수사관으로 참여했다.[1]
- 사료 수집 - 1927년 채방부·정비부를 두어 각지의 사료를 대대적으로 모으고 정리했다.
- 『조선사』 편찬 - 시대별 편찬부를 두고 사료를 연대순으로 늘어놓은 『조선사』를 1938년 37책으로 완간했다. 본문을 35권으로 세는 자료도 있다.
- 부속 간행물 - 사료 20종을 골라 『조선사료총간』을 내고, 귀중 기록·고문서·필적 등을 사진으로 묶은 『조선사료집진』 3책을 펴냈다.[1]
『조선사』는 사료를 옮겨 적는 형식이었지만, 무엇을 싣고 뺄지를 고르는 과정에서 식민 사관을 드러냈다. 예컨대 통일 신라 시기를 다룬 제2편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대체로 옮기면서도 왕실 계보, 중국과의 관계, 일본에 불리한 기사를 줄이거나 빼고, 발해사를 제외했으며 중국 사료를 한국 사료보다 앞세웠다는 분석이 있다.[2] 한국사가 주변 나라에 끌려다녔다는 타율성론, 단군을 신화로 깎아내리는 서술 등은 광복 뒤에도 오래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이에 맞서 신채호·박은식 등의 민족주의 사학과 진단 학회의 실증 사학, 정인보 등의 조선학 운동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