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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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花郞徒)는 신라에서 진골 귀족 자제 가운데 뽑힌 화랑을 우두머리로, 그를 따르는 낭도들이 함께 무리를 지어 도의와 무예를 닦던 청소년 수련 단체로, 진흥왕 때 국가 조직으로 정비되어 삼국 통일 전쟁에서 많은 인재와 군사를 길러 냈다.

삼한 시대부터 마을 청소년들이 집회소를 두고 함께 수련하던 전통이 있었는데, 6세기 신라가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고 정복 전쟁에 나서면서 나라가 이를 인재 양성 조직으로 끌어들였다. 법률로 정한 관청은 아니었고, 반은 나라가 이끌고 반은 민간이 꾸린 조직이었다.[1]
『삼국사기』는 576년(진흥왕 37) 봄에 처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고 적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방법을 찾다가 사람들을 무리 지어 놀게 하고 그 행실을 보아 뽑아 쓰려 했다. 미녀 남모와 준정을 뽑아 무리 300여 명을 모았으나, 준정이 남모를 시기해 술에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되고 무리는 흩어졌다. 그 뒤 얼굴이 곱고 행실이 바른 남자를 뽑아 화랑이라 하고 받들자 많은 무리가 모여들었다.[2]
『삼국유사』는 진흥왕이 나라를 일으키려면 풍월도를 먼저 일으켜야 한다고 여겨 좋은 가문의 남자 가운데 덕행 있는 이를 뽑아 국선(國仙)이라 했고, 처음 받든 이가 설원랑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576년보다 앞선 562년 대가야 정벌 때 이미 화랑 사다함이 싸움에 나섰다. 그래서 화랑도가 나라 조직으로 자리 잡은 것은 576년보다 이른 진흥왕 대의 일로 본다.[1]
- 구성 - 화랑 1명, 그를 지도하는 승려, 그리고 수백에서 1천 명에 이르는 낭도로 이루어졌다. 화랑은 진골 귀족 가운데 낭도의 추대를 받아 뽑혔고, 낭도에는 귀족부터 평민 자제까지 여러 신분이 섞였다. 신라 전 시대를 통틀어 화랑은 200여 명이었다고 한다.[1]
- 수련 - 대개 15~18세에 3년쯤 함께 지내며 남산·금강산·지리산 같은 명산과 큰 강을 찾아다니고, 노래와 춤을 즐기며 도의를 닦았다. 수련을 마치면 정규 부대인 당·정에 들어가 군인이 되었다.
- 덕목 - 진평왕 때 승려 원광이 지어 준 세속 오계(사군이충·사친이효·교우이신·임전무퇴·살생유택)가 화랑의 계율로 받아들여졌다. 경주 임신서기석에는 두 젊은이가 『시경』·『상서』·『예기』·『춘추전』을 3년 안에 익히고 나라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한 글이 새겨져 있다.
- 미륵 신앙 - 화랑은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김유신의 무리는 용화향도라 불렸다.[1]